1991년 3월 1일 창간된 강서양천신문은 지방자치제도의 회귀와 함께 지역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창간호 지면에는 당시 강서와 양천의 생활 모습과 지역 현안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출근길 풍경과 지하철 공사 현장, 시장 물가와 주민 이야기까지 평범한 일상이 오늘의 기록으로 남았다.
1. 정식 창간 전 예비호
1991년 3월 1일 발행되기 3주 전인 2월 8일 발행된 강서양천신문 ‘예비호’. 강서·양천을 대변하는 언론의 출발을 알린 역사적인 지면이다. 당시에는 세로쓰기로 신문을 발행했다. 1992년에는 가로쓰기와 세로쓰기를 혼용하다가 1995년을 기점으로 현재의 가로쓰기로 개정됐다.
2. 강서양천신문 첫 창간 축사, 김대중 전 대통령
당시 평화민주당 총재였던 김대중(1924.01.06.~2009.08.18.) 전 대통령이 ‘지역주민의 절친한 벗이 되라’라는 제목으로 강서양천신문의 출발을 응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지역신문의 역할과 기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역신문의 발전이 이제까지 획일화되었던 중앙 일간신문들의 권위주의적 편집을 어느 정도 시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3. 편집국 사람들과 신문 제작 과정을 그린 만평
강서양천신문의 포문을 연 개국공신의 모습이다. 임재현 차장을 필두로 취재기자 손정순, 이동기, 임혜선, 임미정, 사진부장 송성균, 사진기자 조형우, 편집기자 이균홍, 한세우, 기고가 최창윤, 디자이너 김보영, 광고부장 박권철, 광고차장 김재영, 관리부장 오윤열, 관리담당 김지난의 활기찬 얼굴이 예비호에 실렸다. 얼마나 큰 포부를 갖고 신문사가 문을 열었는지 알 수 있다. 신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그려낸 만평도 꽤 흥미롭다. 기자들이 모여 편집국에서 편집회의를 하고 취재를 한 뒤 기사를 작성한다. 여기까지는 지금도 같지만, 다음 단계인 편집과 교정 작업은 몇 년 사이 컴퓨터로 처리되고 있다. 예전 기자들은 편집국장 앞에서 빨간 펜으로 난도질 된 자신의 기사를 받아 들고 처참하게 울기도 했다고 한다.
4. 1991년 아침 출근길 풍경
그 시절에도 교통난은 여전했다. 중앙차로제가 시행되기 훨씬 이전이라는 게 지금과는 다른 부분이다. 왼쪽 길가 버스정류장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승용차도 꽤 많다.
당시에는 현대 포니가 도로를 달렸고, 당시 신차였던 스텔라와 봉고 승합차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은 찻길에는 외제차량이 꽤 많이 보이는데 이때만 해도 국산차 훨씬 많은 수를 차지함을 알 수 있다.
5. 그때 그 시절 시장 물가
어린 시절 어머니나 할머니 손을 잡고 전통시장을 찾아 장을 보던 때가 있었다. 요즘은 무게 단위가 ㎏ 등으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홉, 되 등의 단위가 주로 쓰였다.
최근 K푸드 인기로 김값이 크게 올라 전국 평균 김값은 100장에 2만2000원 수준이며 비싼 경우 3만5000원 이상에 거래되기도 한다. 당시에는 약 6000원에 거래됐다.
반면 바나나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 이전이라 가격이 높았다. 1㎏에 3000원으로 당시 물가를 고려하면 꽤 비싼 편이었다.
6. 지하철 5호선 공사 현장
기사에 따르면 1990년 6월 27일 서울지하철 5호선 공사가 착공됐으며, 1992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최근 강서구와 양천구를 잇는 대장홍대선이 착공됐고, 강서구에서는 강북횡단선 추진위원회가 출범했다. 그 사이 서울과 서울 외곽을 잇는 지하철 그물망은 더욱 촘촘해지고 단단해졌다.